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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게임=서형욱] 우승권이라 보기엔 힘든 전력이었다. 3부 리그로의 강등을 간신히 면한 게 고작 4년 전인 팀이다. 하지만 갑작스런 상승세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1부(EPL) 승격의 여세를 몰아 마침내 EPL 챔피언 자리에 등극하며 포효할 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광의 시간은 짧았다. 중위권을 맴돌며 고전하던 그들은 EPL 우승 4년만에 2부리그(당시 디비전1)로 강등되고 말았다. 1995년 EPL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했던 블랙번 로버스의 얘기다. 


20년 전 블랙번 얘기를 꺼내는건, 이들의 모습이 지난 시즌 '깜짝' 우승을 차지한 레스터 시티의 현재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변의 우승을 차지한 뒤 내리막길을 걷는 모습에서 EPL 팬들은 두 팀의 유사점을 본다. 그리고 이들의 사례는, 일시적인 성과를 낸 중간 규모 클럽이 EPL에서 존재감을 유지한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려주는 교본이다.


두 팀의 운명이 이처럼 곧장 비견되는 것을 보면, 1992년의 '그 날'은 마치 신이 미리 준비해 둔 예고편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1992년 5월, 두 팀은 1부리그 승격팀을 가르는 2부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맞대결을 펼쳤다. 아직 신축하기 이전의 옛 웸블리 경기장에서 만난 두 팀은 이듬해 창설될 프리미어리그(EPL)의 원년 멤버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두고 혈전을 벌였다. 결과는 블랙번의 승리였다. 블랙번은 EPL에 합류했고, 2부에 남은 레스터는 2년이 지난 뒤에야 EPL에 합류할 수 있었다. 


블랙번의 향기 | 1995년 우승, 1999년 강등


둘 중 먼저 EPL의 맛을 본 블랙번은, 그때 이미 나름의 야망을 품고 있던 팀이다. 하위 리그를 전전하던 블랙번은 1988년 영국의 철강왕 잭 워커가 막대한 돈을 투자하기 시작하면서 상승세를 탔다. 블랙번이 고향인 워커가 기부한 자산은 블랙번이 경기장을 증축하고 유망한 선수들을 영입하는 비용으로 쓰였다. 하지만 팀 성적은 생각만큼 개선되지 않았고, 답답한 워커는 1990/91 시즌 도중 팀을 아예 인수해버렸다. "영국 최고의 팀, 나아가 유럽에서 상위권 경쟁을 하는 팀으로 만들겠다"는 워커의 선언은, 아직 축구 산업이 지금처럼 거대해지기 전이던 그 무렵 축구계에선 굉장한 이슈로 받아들여졌다. 



강등 위기에 놓여있던 팀을 간신히 2부 리그에 살려둔 워커는 EPL 승격을 위해 구단 환경과 선수단 구성 모두에 큰 돈을 쓰기 시작한다. 인수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리버풀의 레전드 케니 달그리시를 감독으로 모셔왔고, 첫 3년 동안 2500만 파운드 이상의 돈을 선수 영입에 쏟아 부었다. 이 기간, 블랙번은 두 차례나 영국 역대 최고 이적료 기록을 경신했는데 - 지금 보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지만 - 1992년 앨런 시어러를 사우스햄턴에서 데려오며 쓴 330만 파운드로 한 번, 1994년 크리스 서튼을 노리치에서 데려오며 쓴 500만 파운드로 영국 축구계를 뒤흔들었다. 


적극적인 투자와 새 감독의 구상은 블랙번을 2부 리그 강등권 팀에서 승격팀으로 바꿔놓았다. 리그 6위로 승격 플레이오프에 뛰어든 블랙번은 4위 레스터를 제치고 1부 리그로 승격을 확정한다. 이로써 블랙번은 프리미어리그 원년(1992/93) 멤버로 워커 회장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초석을 닦는 데에 성공한다. 


워커 회장의 투자는 블랙번이 EPL에서 빠르게 상위권에 자리잡는 일등 공신이었다. 달그리시 감독의 블랙번은 승격과 함께 영입한 앨런 시어러의 압도적인 득점력을 앞세워 EPL에서 존재감을 확장해 나갔다. 첫 시즌 4위로 모두를 놀래킨 블랙번은 이듬해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며 파란을 일으키더니, 다음 시즌인 1994/95 시즌 내친김에 우승까지 차지해버렸다. 34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앨런 시어러와 그의 파트너 크리스 서튼의 공격 조합은 위력적이었고, 헨드리, 르소, 배티, 베리 등 수비와 미드필더의 헌신적인 선수들은 팀 승점을 잘 지켜냈다. 리그 최다골을 기록한 블랙번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승점 1점 차로 제치고 사상 첫 EPL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달그리시 감독은 두 개 클럽에서 잉글랜드 리그 정상에 오르는 역대 세 번째 감독이 됐다. 


하지만 우승의 여운은 짧았다. 당시 유럽 축구는 각 리그 우승팀들에게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주는 시스템이었다. 잉글랜드 챔피언 블랙번은 이듬해 리그와 리그컵, FA컵,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병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이미 필생의 꿈을 이룬 잭 워커 회장(2000년 사망)의 투자는 보수적으로 바뀌었고 블랙번의 전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달그리시 감독마저 단장으로 팀 지휘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되자 블랙번은 우승권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우승 이듬해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기 탈락했지만 리그에선 7위로 선전한 블랙번은 이듬해 13위로 순위가 급락하더니 1998/99 시즌, '라이벌' 맨유가 '트리플 크라운'(리그,FA컵,챔스 동시 우승)의 영예를 차지하던 시즌, 2부 리그(디비전1)로 강등됐다. 



블랙번의 추락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우승을 차지한 뒤 야망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게 공통적인 지적이다. 어릴 적부터 응원해 온 고향팀 블랙번 로버스의 우승을 꿈꾸며 2부 리그 클럽에 사재를 털어 넣은 잭 워커 회장은, 블랙번이 (자신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맨유를 제치고 EPL 우승을 차지하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았다. 우승의 주역이던 앨런 시어러는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우승 직후 팀 전력이 강화되지 않는 것을 보고 떠나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결국 시어러는 우승 직후 시즌 블랙번 옷을 입고 한 차례 더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뒤 뉴캐슬로 이적했다. (맨유의 퍼거슨 감독은 시어러 영입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맨유를 극도로 싫어하던 워커 회장의 반대에 막혀 영입에 실패하고 말았다.) 시어러의 이탈은 블랙번의 불꽃이 이제 사그라드렀음을 의미하는 징표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블랙번은 그 뒤 2년만에 다시 EPL에 복귀해 꾸준히 잔류에 성공하다 2012년 다시 2부리그(현 챔피언십)로 강등됐다. 올 시즌엔 2부리그 강등권에서 허덕이며 3부리그 추락이 우려될만큼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부진한 레스터 | 2016년의 우승, 2017년의 위기 


지난 시즌의 레스터는 1995년의 블랙번보다 더 위대했다. 20년 전의 블랙번이 라이벌 팀들에 비해 재정적으로 윤택한 환경에서 팀을 꾸렸다면, 2016년의 레스터는 리그 상위권에 들만한 축이 아닌 작은 클럽에 불과했다. 2010년 팀을 인수한 태국 컨소시엄 '킹 파워'가 투자를 아낀 것은 아니지만, 챔피언십에 머물던 당시나 EPL로 승격한 이후 모두 레스터는 막대한 투자금의 힘이 돋보이는 류의 클럽은 아니었다.  당연히, 지난 시즌 개막 직전까지 누구도 그들에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스터는 시즌 내내 수위를 지키다 결국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이변'이라는 점에선 공통 분모가 있지만, 그 외엔 두 팀 사이에 그렇게 큰 닮은 점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레스터에게 유리했던 점이라면 공교롭게도 상위권 클럽들이 일제히 극도의 부진을 겪은 시즌이라는 것이다. 전년도 우승팀, 그러니까 디펜딩 챔피언인 첼시는 속적없이 추락했고(최종 10위), 맨체스터의 두 팀과 리버풀의 두 팀 역시 별 볼 일 없는 성과에 그쳤다. 오로지 북런던의 두 클럽이 꾸준하게 레스터의 뒤를 밟았지만, 이들마저 그렇게 위력적인 시즌을 보내진 못했다. 결국 레스터는 2위 아스널에 승점이 무려 10점이나 앞선 채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 영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는 축구 프로그램인 BBC의 <MOTD> 진행자 개리 리네커는, 자신이 뛰고 또 응원하는 팀 레스터 시티의 우승 가능성에 시즌 초 '역레발 공약'을 내걸었다가 다음 시즌 개막 직전 방송에서 '반라' 퍼포먼스를 펼치는 유쾌한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지난 시즌 레스터 시티 우승은 여러 외부 요인 외에 일단 팀 자체가 견고한 축구를 했다는 점에서 자격이 충분한 성과였다. 다른 팀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선수들을 효율적으로 조합한 라니에리 감독의 용병술은, 마침 모든 선수들이 제 몫 이상을 해내며 최고의 결과로 이어졌다. 6년 전 3부리그(리그1)에 머물던 레스터는 EPL로 승격한 지 두 번째 시즌 밖에 되지 않는 약체 클럽이었지만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들이 똘똘 뭉쳐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바디, 마레즈, 드링크워터, 캉테, 모건, 슈마이켈 등 순위 경쟁팀 누구와 비교해도 딱히 뛰어난 기량을 가졌다는 평가를 듣지 못하던 이들이 그야말로 '반란'을 일으킨 셈이다. 


하지만, 이어진 이번 시즌 레스터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득점력이 반감된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아킬레스건이다. 지난 시즌 공격을 '쌍끌이'하던 바디와 마레즈는 리그 24라운드까지 진행된 현재 둘이 합쳐 10골 밖에 뽑아내지 못했고 - 지난 시즌 24라운드까지 둘이 합쳐 31골을 넣었다 - 레스터는 현재 24득점 41실점의 '적자' 축구로 강등권 근처인 16위까지 떨어져 있다. 지난해 이맘때  44득점 26실점으로 리그 1위를 질주하던 것에 비하면 크게 약화된 전력인 셈이다. 


중원의 캉테를 잃은 것은 분명 큰 손실이지만, 바디와 마레즈 등 주요 선수 대다수를 지켜낸 레스터 입장에선 실망스런 성과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현지에선 라니에리 감독 경질설까지 나돌만큼 분위기가 흉흉하다. (지난 7일, 레스터 구단은 이런 루머에 대항하듯 공식 성명을 내어 "최근 성적이 부진하긴해도 전례없는 성공을 일궈낸 라니에리 감독에 대한 구단의 신뢰는 변함없이 확고하다"고 밝혔다.) 역대 최악의 EPL 디펜딩 챔피언 후보군에 들만한 지난 시즌의 첼시나 96년의 블랙번과 비교해도 더 좋지 않은 흐름이다. 



블랙번보다 나은 것은 챔피언스리그 성적이다. 조기 탈락한 블랙번과 달리, 올 시즌의 레스터는 조별리그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며 16강에 올라 있다. 16강에서 세비야를 만나는 레스터에겐, 어쩌면 챔피언스리그가 더 기대되는 대회인 시즌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전력을 분산시켜야 하는 상황이 레스터에겐 몹시 부담스러운게 사실이다.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레스터에겐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이 경우, 올 시즌 리그 강등을 면한다해도 다음 시즌은 이번보다 더 큰 위기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0년 전의 블랙번에서 시어러가 우승 1년 뒤 팀을 떠난 것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 공산이 크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바디나 마레즈 같은 선수들을 계속 붙잡아두기 힘든 상황이 될 것이다. 이 경우 레스터는 올해보다 줄어든 예산으로 우승권보단 강등권이 더 친숙한 시즌을 보낼 가능성이 높다.

레스터와 블랙번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긴 어렵다. 그 무렵에 비해 지금 EPL은 대부분의 팀들이 과잉 또는 과도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웬만큼 투자를 하지 않고선, 지략이나 행운만으로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한다는게 불가능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스터는 자신들에게서 풍겨나는 그 시절 블랙번의 향기에 탈취제를 써야 한다. 그러려면 블랙번이 겪었던 추락의 이유를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는 바뀐 게 별로 없더라도, 속내는 다들 이전과 다를 것이다. 우승을 경험한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은 운영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걸 블랙번이 보여줬다. 단지 투자의 유무 외에도, 목표가 사라진 클럽에선 기대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 금전이든 또 한 번의 우승이든, 그걸 이끌어낼 수 있는 지휘력, 프런트의 의지가 요구된다. 예로부터 라니에리는 수성을 잘 하는 감독이었다. 그의 장점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최근의 움직임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레스터가 이런 노력 속에, 결국엔 EPL에서 견고하게 자리를 굳히는 팀이 될 수 있을 것인지 기대된다. 


기사제공 서형욱 칼럼


  • 울산태호 2017.02.10 04:26
    네이버에서 본 기사지만 씁.. 뭔가 데칼코마니느낌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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