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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형 미드필더의 전설 레돈도


과거 수비형 미드필더라고 하면 갖다 부딪치고 싸우는 전투적인 선수들이었다. 카를로스 둥가, 토마스 그라베센, 에드가 다비즈, 젠나로 가투소, 게리 메델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의 이름들 앞에 한결같이 ‘미친X’하는 식의 별칭이 붙곤 했던 이유다.


현재적 의미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세계 축구 전면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80년대다. 현대축구가 태동했던 100여 년 전에도 하프백, 센터하프 등의 이름으로 엇비슷한 포지션과 역할이 존재했지만 ‘수비형’이란 세분화된 역할과 위치로 전문화 된 건 3,40년 전이었다.


1980년대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이끌던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이 공격형 미드필더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구분해 세운 3-2-3-2(3-5-2의 가운데 ‘5’를 2와 3으로 나눈) 포메이션을 쓰면서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존재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2명의 수비형 미드필더와 3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세운 전형이었다. 이전까지의 미드필더가 공격과 수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뭉뚱그린 중앙 미드필더였던 것과 차이 나는 변화였다. 3선으로 구분되던 포메이션이 4선 이상으로 쪼개지면서 나타난 흐름이기도 했다. 당시 빌라르도 감독은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하는 공격라인의 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드필드에 수비에 주력하는 선수를 세웠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세르히오 바티스타였다.


빌라르도 감독의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1986년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앞선 공격수들의 수비 부담을 줄이고 상대 공격을 전담해서 차단하며 공격과 수비의 전환을 빠르게 연결하는 수비형 미드필더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기 시작했다. 수비형 미드필더의 역할론과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이 위치의 선수들을 강조해 따로 칭하는 표현들도 세계 각지에서 등장했다. 영어권에서는 붙잡거나 지탱한다는 의미의 홀딩 미드필더(Holding Midfielder)나 앵커(Anchor), 이탈리아에서는 부딪치는 사람이란 뜻의 인콘트리스타(Incontrista)나 저지하는 사람이란 뜻의 인테르디토레(Interditore), 스페인에서는 수비적인 선수라는 뜻의 피보테 데펜시보(Pivote Defensivo), 독일에선 파괴자란 뜻의 체르슈퇴러(Zerstorer) 포르투갈에선 자물쇠란 의미의 트링쿠(Trinco)로 수비형 미드필더를 따로 구분해 불렀다. 수비형 미드필더들이 즐겨 달았던 등번호 5번과 6번을 따 아르헨티나에선 5번을 뜻하는 누메로 씬코(numero cinco), 독일에선 6번을 의미하는 젝서(Sechser)라 부르기도 한다.


수비형 미드필더의 국가별 표현


영어권Defensive Midfielder / Holding Midfielder / Anchor


이탈리아 Incontrista / Interditore


스페인 Pivote Defensivo


독일  Vorstopper / Zerstorer / Sechser


프랑스Recuperateur / Numero 6


브라질 Volante / Primeiro Volante


포르투갈Trinco


아르헨티나Volante Defensivo / numero cinco


네덜란드 verdedigende middenvelder


세계 각국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수비형 미드필더들은 상대 공격수들과 부딪치고 싸우는 터프가이들이었다. 수비라인 바로 앞의 위험 지역에서 상대 선수들의 공을 뺐거나 공격을 지연시키며 같은 편의 빈 곳을 커버하는 수비적인 역할들이 이들의 주된 임무였다. 과거엔 때문에 잘 싸우는 선수가 이 위치에 제격이었다. 


등번호 6번의 전설이자 교과서


아랫줄 맨 왼쪽이 당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마켈렐레


물론 과거의 수비형 미드필더들이 모두 다 헬보이는 아니었다. 등번호 6번의 전설이자 교과서로 불린 페르난도 레돈도만 하더라도 왼발의 우아한 볼터치와 정교한 패스 연결이 일품인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1990년대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당시 맨유를 이끌고 그를 상대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레돈도를 가리켜 “무슨 신발에 자석이라도 달려 있는 것 같다”고 극찬한 볼 간수 능력과 연결, 탈 압박 능력은 유명했다.


수비적 위치에서도 레돈도처럼 우아한 공격 센스를 보여준 경우가 있었지만 대개는 수비형 미드필더하면 상대 공격수들을 붙잡고 저지하며 뺏고 무너뜨리는데 능한 선수들이었다. 수비가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것처럼 공격도 마찬가지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공격수들은 물론 수비수들까지 오버랩 등으로 활발하게 공격에 가담하게 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한 특화된 ‘수비적’ 선수들의 역할이 더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존재감으로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클로드 마켈렐레였다.


레알 마드리드, 첼시, 파리 등지에서 활약한 마켈렐레는 특히 지단, 피구, 호나우두, 라울 등 초특급 공격수들이 즐비했던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면서 자칫 부족할 수 있는 수비 밸런스를 혼자 책임지다시피 한 당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마켈렐레는 경기 내내 쉬지 않고 수비라인 앞을 쓸고 다니면서 상대 공격을 무력화 시켰다. 당시 라리가와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줄줄이 우승을 차지했던 레알 마드리드의 중요 패턴 중의 하나가 ‘마켈렐레가 끊어내면 지단이 전개한다’였을 정도로 마켈렐레의 존재감은 컸다.


진화한 수비형 미드필더들


과거 터프한 수비형 미드필더의 대표격인 '매드독' 그라베센 


하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는 이후 또 한 번 변화한다. 상대 공격수들을 잡는 제한된 수비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공격도 활발하게 전개하는 존재로의 확장이다. 최전방 공격과 최후방 수비의 간격이 보다 좁아지고 공격과 수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공격도 잘하고 수비도 잘하는(해야 하는) 미드필더의 필요가 극대화된 때문이다. 


공격과 수비 중 하나만 잘하거나, 하나를 못하면 ‘반쪽짜리’ 선수로 치부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수비는 좋은데 패스 전개는 약하거나, 연계 플레이는 좋은데 맨마킹은 떨어지거나 하는 식이다. 수비형 미드필더라 불렸던 선수들은 기존의 수비라인 앞에 서서 공을 소유한 상대 공격수를 잡고 빈 공간을 커버하는 수비력 못지않게, 상대의 압박이 상대적으로 적은 자기 진영에서 공격을 풀어나가야 하는 능력까지도 갖추어야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진화한 대표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들이 마이클 캐릭, 사비 알론소, 세르지오 부스케츠, 토니 크로스, 은골로 캉테 등이다. 일정한 수비력은 기본이고 영리한 움직임을 통한 수적우위, 자기 팀 대형의 좌우 폭과 깊이 조정, 공격 전개 시 안정적 빌드 업, 탁월한 시야와 기술을 통한 중장거리 패스와 경기 운영 등 하나 같이 뛰어난 공격 전개 능력을 갖춘 선수들이다. 과거의 개념만 가지고 본다면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표현이 충분치 않은 존재들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다 담기에 부족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실


첼시 콘테 감독 축구의 돌풍을 이끌고 있는 캉테


지난 주말 첼시와 아스널전에서 극찬을 받았던 캉테가 현 프리미어리그에서 진화한 수비형 미드필더로 가장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콘테 감독의 첼시가 스리백으로 전환하고 승승장구하며 유력한 우승후보로 부상한데는 캉테의 존재와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스리백은 기본적으로 양쪽 윙백 뒤가 열릴 수 있다. 공격 시 윙백들이 윙처럼 전진해 공격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윙백 뒤를 커버해야 하는데 엄청난 운동량의 캉테가 있기에 가능한 전술이다. 또 첼시의 스리백은 후방에만 머물지 않고 앞 선에 공간이 열리면 직접 전진해 공격에 가담한다. 이 역시도 커버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캉테의 마라토너급 심폐지구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캉테는 지난 주말 아스널전에서도 양 팀 통틀어 두 번째로 많은 12.09km를 뛰었을 정도로 매 경기 철인급 활동량을 과시하고 있다. 


캉테의 수비 공헌은 엄청난 운동량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태클과 인터셉트 등 구체적 수비 스탯에 있어서도 캉테는 언제나 톱클래스에 위치해 있다. 캉테는 지금까지 이번 시즌 23경기에서 뛰면서 82개의 태클을 성공시켜 프리미어리그 전체 미드필더 선수 중 3위에 올라 있다. 인터셉트 부문에서도 54개로 3위다. 캉테의 존재감이 수비에서만 빛나는 건 아니다. 이것이 다라면 과거의 선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공격 전개 능력이다. 캉테는 패스 성공 개수와 볼터치에 있어서도 톱10 안에 위치해 있다. 캉테는 패스 성공 1396개로 공격형 선수들을 포함한 프리미어리그 전체 미드필더 선수 중 5위에 랭크돼 있다. 볼 터치 횟수도 1756개로 전체 미드필더 중 7위다. 공격 전개 능력에 있어서도 클래스를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캉테의 이 같은 공격 전개 능력은 수비에서 빠른 공격 전환을 특히 강조하는 콘테 감독의 축구와 맞물려 존재감을 더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맨유나 아스널, 리버풀 등 라이벌 팀들이 고민을 거듭한 포지션도 캉테처럼 공격과 수비를 모두 잘 할 수 있는 미드필더였다. 이는 비단 프리미어리그 뿐만 아니라 현 전 세계 축구의 공통분모의 일이다. 현대축구의 변화 흐름과 맞물린 일인데 축구 시장에서 이와 같은 선수들을 찾으려는 노력과 투자는 가열되겠지만 한편으론 이들의 역할과 필요가 진화했던 것처럼 또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할지 특정하기 어렵단 것이다. 축구(전술)는 멈추지 않는다, 수비형 미드필더들의 진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실이다.

기사제공 축구전문가 박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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